원고지/문화 비평

고다르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영화 <이미지 북>(2018)

공부를 합시다 2021. 3. 31.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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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호가이건 아니건 이름은 들어봤을 법한 감독이 있다. 프랑스의 영화 감독 “장 뤽 고다르”도 그런 이름 아닐까. 고작해야 내가 본 이 감독의 작품은 <네 멋대로 해라>, <중국여인> 정도인데, 거의 의무감에서 본 영화인 듯하다. 유명하다고 하니 군중심리에 휩쓸려서 본 영화라고 할까. <네 멋대로 해라>는 그 영화 제목만으로도 익숙하고 내 기억으로는 과거 텔레비전에서 몇번이나 상영을 해줬던 듯하다. 그리고 <중국 여인>은 브레히트의 영향을 확인하고픈 생각에 애써 시간을 내서 봤던 작품이다. 영화 전체를 차지하는 '생소화 효과'에 정신을 잠시 잃어버릴 뻔했지만 말이다. 고전적인 서사에서 벗어난 영화인지라 고다르의 영화는 지금껏 큰 흥미를 복돋아주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나는 지독히도 고다르가 깨고 싶은 '이데올로기적 환상'에 푹 젖은 사람인 듯하다(어쩌랴, 내 멋대로 보련다!).

최근 고다르의 이미지는 최근에 작고한 아네스 바르다의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서 나타난 그의 인상이다. 영화의 끝무렵 바르다는 제이알을 자신의 오래된 동료 고다르를 소개시켜주겠다고 같이 찾아가는데, 메모 한 장 남기고 고다르는 이들을 만나주지 않는다. 옛 친구의 장난에 마음이 상한 바르다가 훌쩍거리는 장면에서 나는 절로 ‘괴팍한 노인네’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바르다나 고다르의 나이를 봐서는 다시 만난다는 게 앞으로는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올해 바르다는 세상을 떠났으니 나의 추측은 틀리지 않은 셈이다. 그래도 고다르가 여전히 영화를 찍었다는 게 굉장히 놀랍고 신기한 일이다. 이제는 영화 교과서 한귀퉁이에서만 만날 줄 알았는데 여전히 현역이니 말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필름앤비디오 색션으로 <디어 시네마: 오래된 이미지, 다른 언어> 프로그램의 하나로 고다르의 영화 <이미지 북>이 상영작 목록에 올라가 있었다. 지난 토요일은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저녁에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래봤자 영화 상영 10분 전에 극장에 입장했지만 말이다. 참으로 놀라웠던 일은 이미 만석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예전에 몇 번 미술관 극장을 간 적이 있는데 이 정도로 객석이 가득 찬 걸 보지 못했다. 그때도 나는 항상 영화 상영 10분 전 입장이었는데 말이다(이게 다 시중 극장의 “상영시간 10분 후 상영”이라는 고지 때문에 생긴 버릇이다). “고다르”는 고다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순간이었다. 유명하다는 것은 적어도 한번쯤은 고개를 돌려 관심을 보이게 하는 요인인 듯하다. 수많은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의 눈에서 어떤 기대를 봤다!

90분 정도의 상영시간 동안 불편한 좌석 때문인지 몰라도 이미지와 자막을 따라가느라 괘나 애를 먹었다. 이야기를 따라간다는 것은 진작 포기(?)하고 이미지의 파편과 사운드에 초점을 둘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다른 관객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영화가 끝났을 때 우르르 빠져나가는 관객을 보며 저들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 달려가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왜냐하면 영화가 끝났을 때 뭔지 모를 그들 사이에서 안도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 시간을 견디었다는 그런 기분 말이다.

 

 

수많은 이미지를 참조한 영화에서 극장을 나오고 나서 내게 남는 이미지와 사운드는 없다. 오히려 질문 하나만이 남았다. 그 질문은 ‘혁명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이었다. 제국주의의 원죄가 있는 유럽의 감독으로서 20세기 전후반을 살아온 노장이 말년에 던진 질문치고는 꽤나 묵직하게 들렸다. 수많은 봉기의 실패를 봐왔을 그이기에 지난 세기는 그에게 어떻게 비쳐줬던 걸까. 그리고 더 나아가 이민자 문제와 테러 등 문제에 봉착한 유럽이 과연 혁명의 장소로서 가능한가. 솔직히 유럽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먼 나라 이웃나라 일로만 느껴지고 심지어 유럽이 봉착한 이런저런 문제는 그들이 제국주의 시대 벌인 죄과라고 생각한다. 죄가 있는 그들이 과거를 내팽개치고 스스로 변화의 중심이 되려고 한다는 게 모순처럼 느껴진다. 유럽이 자신의 과거사를 해결하지 않는 한 절대로 혁명의 중심지는 될 수 없으리라. 오히려 죄는 다른 얼굴로 그들을 찾아 가리라 생각한다.

새 술은 새 푸대에만 담을 수 있는 법이다. 새로운 발상, 그것이 변화이든 혁명이든간에 기존의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 조우로 탄생한다. 그러고 보면 왜 고다르가 이번 영화에서 자신이 직접 촬영하지 않고 과거의 수많은 영화와 영상 등 이미지를 몽타주에 의존해 영화를 만들었는지 이해가 된다. 그는 과거에 갇혔고 그 속에서만 미래를 볼 뿐이다. 그래서 노장의 영화는 과거의 이미지를 겹겹이 쌓아 올릴 뿐이다. 여전히 예술적 실천을 할 수 있다는 데서 경외감을 느끼지만 고다르는 사라질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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