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문화 비평

이 영화의 제목은 알라딘이 아니다: 영화 <알라딘>(2019)

공부를 합시다 2021. 3. 31.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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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일 즈음 영화를 보기 보다 흥행의 끝무렵 영화를 보러가는 기분은 다르다. 새로운 영화에 끌리는 설렘보다는 확인하고자 하는 호기심이 더 크다. 왜냐하면 입소문에 끌려 맹목적으로 극장을 방문하기 보다는 거리를 두고 영화를 보면 새롭게 보이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왜’ 끌렸을까라는 호기심을 확인하는 재미가 있다. “천만영화”라는 타이틀을 거머진 영화 <알라딘>(2019)도 그런 이유 때문에 때늦은 영화관람을 했다. 이 작품이 개봉된 날짜가 올해 5월 23일이니까 벌써 두 달이 지난 시기이다. 전국적으로 1,200만명 이상을 관객을 동원했으니까 그 숫자도 놀랍지만 지금까지 스크린에 걸려 있다는 사실도 놀랍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평일 오전 1회 상영은 정말로 관객이 없다. 이런 고즈넉한 분위기가 좋아 이 시간을 즐기기도 하지만. 

 

 

 

“알라딘”, 이 이름은 낯설지 않다. “알라딘”이란 키워드로 영화를 검색해보면 무려 13편의 영화가 검색된다. 극영화에서부터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알라딘”이란 이름은 친구같은 이름이다. 잊을만 하면 기억 저 멀리에서 소환되는 고유명이랄까. 그런데 유독 이번 <알라딘> 영화는 세대불문, 남녀불문, 기타 무언가에 호소하는 듯하다. 흥겨운 뮤지컬 영화라는 장르의 낯섬에도 불구하고 올 봄에 시작해 여름까지 극장가를 강타하고 있으니 말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극장에서 본 마지막 뮤지컬 영화는 <레미제라블>이 끝이다(박근혜의 선거 승리에 얼마나 우울했던지 마지막 시퀀스의 혁명의 노래를 수없이 따라 불렀다).  

 

 

 

우선, <알라딘>의 무시무시한 흥행은 어디에 기인할까? 흥행 동력은 다수의 이유로 과잉결정돼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먼저 눈에 띄는 대목은 여성 주인공 자스민(나오미 스콧)의 매력이다. 영화 제목이 “알라딘”이니까 우리는 "알라딘"이란 이름만을 기억하기 쉽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자스민”이라는 이름만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지금까지 누가 공주의 이름을 기억한다 말인가. 물론, 여성 관객은 다를 수 있지만 말이다. “백설공주”, “신데랄라”, "인어공주"처럼 여성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서는 공주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냥 공주라는 지위로 충분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알라딘”이란 타이틀을 내걸었지만 여자 주인공 자스민이 관람 후에는 더 오랫동안 향기를 남기고 있으니까. 

 

 

 

이 캐릭터의 매력을 확실히 보여주는 대목은, 뮤지컬 영화답게 자스민이 부르는 <Speechless>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도 이 곡이 낯설지 않았다. 어디선가 들어본 기시청을 느꼈을 정도였다. 악당 자파(마르와 켄자리) 앞에서 당당하게(!) 카메라를 째려보며 부르는 자스민의 노래는 일순간 모두를 얼어붙게 만든다. 그 속에는 극중 주변 인물들뿐만 아니라 스크린 넘어 관객까지 짜릿하게 흔드는 마법이 작동한다(나는 유튜브에 떠도는 수많은 <Speechless> 커버 곡을 찾아볼 정도였다). 실제로 이 시퀀스에서 움직이는 캐릭터는 자스민이 유일하다. 다른 인물은 마술이라도 걸린 듯 정지돼 있는 채 이 여성은 당당하게 카메라를 바라보고 외친다(오, 브라보!). 이 장면에서 많은 관객들은 자스민과 같은 해방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공주라는 신분에 갇혀 꿈꾸지 못한 욕망을 자스민과 함께 소리쳐 발산한다. 

 

 

 

여성 주인공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알라딘>의 제목을 “자스민”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아니면 지니?). 이 캐릭터가 이처럼 생생하게 살아있지 않았다면 이 작품은 그저그런 알라딘 영화 중 하나가 됐을 듯하다. 혹자는 이 영화의 흥행 동력을 세대를 아우르는 기억이라고 논평하는데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천만영화라는 트로피를 얻으려면 세대를 아울러야 하겠지만 그 현상은 결과일 뿐이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기억하는 동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는 얼마나 많은가. 그 정도로는 흥행을 보장하지 못한다. 지금, 여기, 우리에게 무언가를 호소하는 지점이 있어야 한다. <알라딘> 영화에서 나는 그 원인을 무엇보다 자스민에게서 찾고 싶다.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고픈 욕망, 이것이야말로 관객이 보고 싶고 실현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알라딘>은 프레임 너머 관객에게 손짓을 하며 벗어나라 속삭인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전형적인 인물상과 조금씩 어긋나 있다. 영화의 극 시대적 배경에서는 꿈꾸지 못하기 힘든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하니 말이다. 악당도 예외가 아니다. 전형적인 악인인 자파의 신분은 본래 좀도둑이다. 그런데 재상을 넘어 술탄을 꿈꾸고 있다. 심지어 현실의 제약을 마술의 힘을 빌려 극복하려 노력한다. 알라딘 또한 그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공주와 사랑을 꿈꾸고 마지막에는 쟁취한다(?) 술탄(데이비드 네가반)도 처음과 달리 극 말미에는 딸의 욕망을 인정한다. 술탄의 장군 하킴(너멘 아카)도 자신의 직책의 의무를 따르지 않고 양심을 따른다. 이처럼 이야기에서 자스민을 비롯한 모든 인물의 욕망은 그 신분이 갖춰야 할 전형적인 의무와 어긋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속한 세계를 완전히 이들이 탈출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의 재생산 구조를 완전히 탈피하지 않는다. 적당히 비틀 뿐이다. 

 

https://youtu.be/mw5VIEIvuMI

 

 

영화를 볼 때 관객은 양가의 욕망을 지닌다. 자신이 알고 있고 보고 싶은 것을 충족하려는 욕망과 그것을 벗어나려는 욕망이 그것이다. 자신이 사는 세계에 푹 젖어 사는 우리로선 이 세계를 벗어나고 싶어도 탈출하지 못한다. 적당한 공백을 찾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그런 지점에서 <알라딘>은 영리한 선택을 한다. 미투운동(#MeToo)처럼 젠더이슈에 민감한 시기에 여기에 부흥하는 주인공 자스민을 내세웠으니까.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주장하고 싶다. 이 영화의 제목은 <알라딘>이 아니라 <자스민>이 돼야 했다고. 시간이 흘러 언젠가 <자스민>이라는 영화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는 이 땅의 자스민들이 그 동안의 침묵을 깨고 말하는 시대일 것이다. 그래서 외치고 싶다. “자스민에게 말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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