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문화 비평

불안을 바라보다: 영화 <버닝>(2018)

공부를 합시다 2021. 4. 1.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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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자욱한 아침 종수(유아인)는 허겁지겁 뛴다. 벤(스티븐 연)의 은밀한 취미 계획을 듣고  그 현장을 확인하고자 뛰어다닌다. 뿌연 안개로 가득 찬 논길을 뛰는 종수의 얼굴은 절박해 보인다. 매일 아침 부질없는 수색이 반복될수록 주인공의 숨소리는 커져만 간다. 왜 그토록 찾아 헤맬까. 불타버린 비닐하우스는 있을까. 종수의 절박한 달리기가 반복될수록 관객은 의문을 갖는다. 막연한 불안이라는 이유로는 그 집착이 해명되지 않는다. 찜찜한 기분을 남겨두고 생활해도 되건만 종수는 무엇인가에 사로잡혔다. 미스테리한 분위기를 풍기는 벤이 파주를 찾아온 뒤로는 종수의 아집은 더 강해졌다. 황량한 논밭 사이로 불타버린 비닐하우스를 찾아 헤매는 종수의 심정은 뿌연 안개 같다. 비닐하우스 밖에서 얼굴을 갖다 대고 안을 쳐다보는 종수의 얼굴을 비추는 카메라의 시선처럼 흐릿하다. 아침의 연무와 황량한 벌판 그리고 종수의 창백한 얼굴에 이르기까지 영화 <버닝>(이창동, 2018)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물은 불안의 정경을 보여준다.

 

 

영화는 이 불안을 해소시켜 줄 기회를 주지 않는다. 불안의 원인이 되는 대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있다고 들려줄 뿐이다. 영화는 온통 이 불안을 유발하는 소재, 사건, 인물로 가득 차있다. 끝까지 그 정체를 보여주지 않는 벤의 취미는 이 소재 중 하나이다. 관객은 이 실체를 확인할 길이 없다. 정말로 그가 그런 취미를 가졌는지도 그리고 살인범인지도 해소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온 관객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는데 영화는 막을 내려버렸다. 해결의 단서를 어디서 발견해야 하나.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른다. 영화는 공백으로 온통 가득 찼다. 이 영화에서 그 빈틈을 채우기 위해 동분서주해도 소득이 없다. 오히려 그 틈을 채우지 말고 즐겨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불안이 정체를 드러내면 그것을 어떻게 감당하겠냐고 말이라도 하듯이.

 

 

https://youtu.be/sW8jVAwJsxg

 

 

새벽녘 종수에게 걸려오는 전화는 불안의 서곡이다. 수화기 너머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전화는 단잠을 깨웠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냥 끊어져 버렸다는 사실 때문에 더 불쾌하다. 누군지 모르지만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몸서리가 쳐지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전화에 종수가 화를 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화는 교묘하게 단서를 남긴다. 하지만 확정하지 않는다. 몇 번의 정체 모를 전화 뒤에 어머니의 전화를 종수는 받는다. 어린 시절 소식을 끊고 나간 어머니가 아들에게 전화를 몇 번 걸었을까. 아들을 향한 미안함 때문에 전화를 걸고 나서도 말을 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스크린에서 관객이 본 장면이라고는 정체 모를 전화 뒤 어머니의 갑작스런 전화라는 사건뿐이다. 그 사건의 관계를 알 단서는 없다. 영화는 이런 장치를 곳곳에 마련해놓았다. 그러지 않을까라는 의문만 관객에게 남겨놓고서.

 

 

관객의 상상을 자극하는 불안의 소재는 영화에서 넘쳐난다. 해미(전종서)가 아프리카 여행을 가며 종수에게 부탁한 고양이는 있을까. 해미의 방을 찾은 종수는 고양이 배변판을 확인했을 뿐이다. 고양이 울음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해미의 집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올라온 이웃도 고양이의 존재를 모른다. 다만 고양이의 존재를 간접으로 지시하는 모래의 흔적만을 봤을 뿐이다. 벤의 집 주차장에서 종수의 호명에 대답하는 고양이의 등장에서야 그 존재를 예감한다. 해미가 어릴 때 빠져 한창 울고 있었다는 마른 우물은 어떨까.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그 우물의 모습은 생생하다. 그러나 종수는 기억이 전혀 없다. 해미의 소식을 탐문하기 위해 들른 식당에서 혜미의 어머니와 누이는 우물의 존재를 부인한다. 유일하게 우물의 존재를 확인하는 인물은 오랜만에 찾아온 종수의 어머니가 다이다. 그러나 종수의 이웃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다. 증언이 엇갈리는 가운데 관객은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해미가 만들어낸 어린시절 에피소드인지 아닌지는 알지 못한다.

 

 

 

 

이야기 속 불안의 정체는 알 수 없다. 결국 누구도 진실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벤을 살해하고 자신의 옷조차도 불태워버리는 종수의 충격적인 사건조차도 마찬가지이다. 새벽녘에 벌인 사건은 해미를 찾지 못해 벌인 종수의 복수였을까. 그리고 심지어 해미는 실존하는 인물인가. 그녀는 종수의 창작의 산물 아니었을까. 해미가 사라진 뒤 종수는 자취방을 찾아 간다. 처음으로 종수가 그녀의 방을 찾았을 때 방의 전경을 카메라는 비춘다. 잡동사니로 쌓인 방은 혼란스럽고 지저분하다. 그러나 해미가 실종된 뒤 찾은 그 방은 깨끗이 정돈돼 있다. 그 방 창가 책상에 앉아 종수는 노트북에 무엇인가를 쓴다. 이 모든 이야기가 종수가 창작한 소설 아니었을까. 우리는 알지 못한다. 카메라는 방 밖에서 종수를 멀리서 무심히 비출 뿐이다. 영화의 파국을 마주한 관객은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해미는 종수에게 진실을 말해보라 요구한다. 마치 그 질문은 관객에게 던지는 우문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영화에서 진실의 정체를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종수가 오고가는 파주와 반포 어딘가 그 진실이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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