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문화 비평

공동체의 이름: 영화 <김복동>(2019)

공부를 합시다 2021. 4. 1.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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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이름, 바로 고유명은 그 사람만의 이름으로 간주되기 쉽다. 그렇지 않다면 고작해야 그 이름을 기억하는 가족, 친구 등 몇몇 사람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의 이름은 범위를 넓혀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이름이 돼야 한다. 왜냐하면 그 이름에는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고통과 상처가 깊숙이 새겨 있기 때문이다. 영광의 기억이 아니라 고통의 기억이기 때문에 반드시 간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김복동”이라는 이름 석자를 우리 공동체의 이름으로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영화 <김복동>의 주인공 김복동은 위안부 피해자로서 1992년 이후 자신이 겪은 전쟁범죄를 증언한 ‘인권 운동가’이다. 나는 ‘인권 운동가’라는 호칭이야말로 김복동이라는 인물의 생애를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일본군 성범죄 피해자라는 사실을 고백한 이후 그녀의 삶은 자신의 기억을 세상 속에 공표하기 위해 전세게를 돌며 증언하는 일로 채워졌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기에 누군가는 숨고 누군가는 주저한 그 일을 김복동은 거동이 불편해 움직일 수 없는 그 순간까지 해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인권운동가로서 김복동을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영화 <김복동>은 인권운동가로서 김복동의 증언의 삶을 따라간다. 영화는 김복동의 증언 이후 그녀의 활동을 보여준다. 그런데 김복동의 삶을 증언하는 이들은 김복동 자신과 나눔의 집 관계자들과 연대한 활동가들이 대다수다. 화면 속에서 김복동을 이전부터 알던 사람은 여동생을 제외하고는 없다. 영화의 오프닝 크레디트가 올라가기 전 나레이션 속에서 전하는 김복동의 언니는 동생의 공개가 가져올 증언 때문에 피해가 올까봐 전전긍긍하고 증언 이후에는 연을 끊어 버린다. 김복동이 스스로 증언을 선택한 이후부터 그녀는 가족에게 외면되는 등 소외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그녀의 증언이 가족조차 기억하기 싫고 심지어 잊어버리려 하는 고통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당사자는 기억하려고 하는데 주변은 그 기억을 말살하려는 데서 김복동 삶의 고통이 느껴진다. 

 

 

 

영화가 끝나고 노래가 흘러 나올 때 기억나는 영화의 이미지는 박근혜 정권의 화해와 치유 재단 설립에 항의해 스크럼을 짜고 항의하는 목소리이다. 그 목소리는 처절하기까지 하다. 경찰에 연행돼 끌려가는 그 순간까지도 기억하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진다. 누군가는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선언하고 싶어하지만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국가차원의 배상, 그리고 역사적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는 한 요원한 일이다. 김복동이 죽는 순간에도 듣고 싶었던 사과의 말을 우리는 언제 듣게 될까. 일본의 극우정권은 가해자로서 역사의 기억을 삭제하고 전범국가의 이미지를 탈피하려고 시도할 뿐이다. 가해자의 사과가 없는 한 피해자의 기억이 계속돼야 할 이유다. 

 

 

영화관을 나오며 나는 근처 구청 앞 도로의 소녀상을 떠올렸다. 하얀 저고리와 검정 치마의 그 소녀는 입을 다물고 웃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김복동을 기억했다. 소녀상이 입고 있던 하얀 저고리와 검정 치마를 입고 있던 김복동의 모습 말이다. 무표정한 소녀상이 웃을 날 김복동도 하늘에서 웃으리라.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김복동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그 이름은 고통의 이름일 뿐만 아니라 저항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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