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와 글쓰기/말하기

말하기는 경청이다

공부를 합시다 2021. 4. 13.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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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 형식의 제목을 나는 싫어한다. 이 형식은 증명을 요구한다. ‘A=A’가 아니라, ‘A=B’이니 왼쪽 항과 오른쪽 항이 왜 같은지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전혀 다른 종류의 두 항을 연결하는 고리를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오늘 내가 등식의 형식으로 제목을 짓고자 한 이유는 섬광같이 어떤 착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등식만이 말하기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무수한 말을 한다. 그 말은 주인을 찾아 꽂힌다. 그 주인은 바로 청자이다. 말을 하는 행위에 이미 반대편의 대화 상대가 내정돼 있다. 그런데 말을 잘 하기 위해서 종종 간과하는 게 있다. 화자 중심의 테크닉을 고안하는 데 몰두한다. 대부분 스피치 책은 화자가 어떻게 말을 시작해 이끌고 종결할지에 초점을 둔다. 하지만 이것은 굉장히(!) 어리석은 짓이다.

 

잘 말하기 위해서 잘 들어야 한다. 잘 듣지 않는데 어떻게 잘 말하겠나. 그런데 우리는 종종 당연한 이 사실을 간과하곤 한다. 일방적인 발표라고 생각하는 말하기 사례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고 실천한다고 가정해보자.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조차 그 준비에서 청자를 상상해야 한다. 암묵적으로 전제되는 청자를 가정하고 슬라이드를 준비하고 시연이 끝난 뒤에는 청중의 질의응답에 대비해야 한다. 모든 말하기는 청자와 커뮤니케이션인 셈이다. 하지만 앞서 지적했듯이 종종 이런 당면 사실을 까먹기에 문제가 발생한다.

말하는 데 급급해 잘 듣지 않고, 심지어 잘 못듣는 척 한다. 일단은 뱉어 놓는 데 초점을 두니 말하기의 효과에 무감각하다. 커뮤니케이션의 구조에 필수적인 요소는 화자, 청자, 미디어, 맥락 등이다. 어느 것 하나가 빠진 채 커뮤니케이션을 고민한다면 그 효과를 보장하기 힘들다. 이 중에서도 의미 형성의 최종 판정자는 바로 청자이다. 청자가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청자의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랴. 첫째도 청자, 둘째도 청자, 셋째도 청자가 중요한 것이다.

 

청자의 중요성을 알지만 그럼에도 청자를 중심으로 두고 말을 하는 것은 힘들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그 이유를 각자가 말하려는 욕망이 너무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각자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배설하려는 욕망이 큰 나머지 그외의 것은 부수적이 되버린다. ‘이 말은 꼭 해야지.’라는 마음의 소리가 대화 내내 메아리친다. 맥락에 맞지 않아도 일단 뱉어야 후련하다. 나 또한 이 말하기의 유혹에 시달린다. 특히나 친구나 지인을 오랜만에 만날 때 그 유혹이 커진다. 저 깊숙이 숨겨놓았던 말을 하고 싶은 욕망에 참지 못하는 것이다.

지난 번 출가한 동생과 오랜만에 식사를 하면 대화를 했다. 그런데 대화 도중 동생이 불쑥 말을 꺼냈다. “목소리가 왜 이리 커?” 순간 움찔했다. 오랫동안 숨겨놓았던 비밀을 들킨 사람이라도 된 듯이 말이다. 말하려는 욕망이 지나쳐 나도 모르게(?) 신나게 떠들었나 보다. 동생과 헤어진 뒤 나는 그 목소리가 오랫동안 떠올랐다. 평소 내가 과묵하다는(?) 착각을 지니고 있었는데 진실은 그게 아닌가 보다. 앞으로 말하기보다 들으련다. 커뮤니케이션하려는 욕망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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