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낙서장

인간은 모순입니다

공부를 합시다 2021. 4. 2.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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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마신 다음 날 아침 전화가 울립니다. 출국 전 날 술을 같이 마신 “윤씨”입니다(지난 번 <연애의 기술>에서 언급된 바로 그입니다. http://aroundstudy.net/221581403343). 단잠을 깨우는 목소리에 짜증반, 무슨 일인가 싶어 걱정반으로 전화를 받았습니다. 공항에서 출국 전 어제 분실한 자신의 시계를 찾는 용건에 더해(칠칠치 못한 인간같으니라고) 나중(?)에 학위가 끝나면 보자는 인사였습니다. 갑자기 그와 나눈 어제 대화가 생각났습니다. 오락가락하는 그의 말에 참(!)으로 인간은 묘하구나라고 헛웃음이 나왔던 술자리였죠.

그 날 그가 털어놓은 말 속 심정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자신은 자살할지 모른다. 둘째, 자신은 결혼하고 싶다. 셋째, 학위를 마치면 출가하겠다. 그런데 이 진술들을 곰곰히 보면 동시에 하지 못할 일일 뿐입니다. 죽겠다는 사람이 결혼한다고 그러지 않나, 결혼한다는 사람이 머리 깎고 출가하겠다고 하지 않나 뭐 그런 거죠. 양립가능하지 못할 일을 계획하는 그의 말에 실소가 나왔지만, 한편으로는 첫 번째 계획(?)을 실행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술자리에서 잘 토닥거리면서 잘 될거라는 등 아낌없는 말잔치를 해줬습니다. 과거 그의 전력으로 봐서는 그냥 지나가는 푸념일 듯하지만 말입니다. 어찌됐듯 인간이란 충동의 동물이니 그 충동을 잘 다스리라고 조언해주었죠.

앞서 모순같은 진술을 제 나름대로 이해하려 노력해봤습니다. 첫째, 자살할 지 모른다는 진술은, 죽음이 생각날 정도로 힘들다는 진술로, 둘째, 결혼하고 싶다는 진술은, 자신의 구애에 응답할 여성이 있으면 좋겠다는 진술로, 셋째, 출가하겠다는 진술은, (그의 말에 따르면) 원불교는 결혼을 허용하니 이 모든 게 가능하다는 진술로 해석해봤습니다. 그러고 생각해보니 세 가지 선택 다 가능합니다. 모두 미래의 계획으로 “~할 지 모른다”는 진술의 형태를 지녔으니 이들은 단정의 진술이 아니니 말입니다. 술자리에서 술이 들어갈수록 진심이 나왔을 지 모릅니다. 그래도 자신의 마음 속 말을 아낌없이 털어놓는 그를 보면 아직은 살 만한가보다라고 안심했습니다. 마흔 후반에 학위를 받겠다는 의지도 있고, 결혼하겠다는 의지도 있으니 말입니다.

인간이란 모순적 존재입니다. 윤씨처럼 양립불가능한 소망들을 가지고 사니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욕망이 진실일까요? 저는 모두 다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사려면 저는 이 욕망(들)을 일단은 인정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설령, 실천하지 못할 욕망일지라도 말이죠. 상상은 자유니 표현이나 실천만 안 한다면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일단은 속 이야기를 배설하는 게 건강한 거죠. 그러고 보면 윤씨야말로 건강한 사람입니다. 저는 한번도 누구에게 “죽겠다”라는 말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죽고 싶다라는 소위 죽음충동이 불쑥 튀어 나온다고 할지라도 속으로 꾹 참을 뿐이죠.

지금쯤 중국 베이징 모대학 도서관 어딘가 공부하고 있을 윤씨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죽음충동도 있지만 사랑충동도 있으니 그 둘을 모두 생각하라고. 타나토스와 에로스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을 그가 공부에서 승화의 해법을 찾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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